영성의 향기

풍경 속 익명의 대서사시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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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브뤼셀 왕립 미술관에서 보는 그림 속 성서 35

피테르 브뤼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1566년, 목판에 유채화, 116×164㎝

나폴레옹이 1794년에 설립한 벨기에의 브뤼셀 왕립미술관(Royal Museums of Fine Arts)은 플랑드르의 대가 피테르 브뤼겔(Pieter Bruegel, 1525?∼1569)의 ‘베들레헴의 인구조사(Census at Bethlehem)’를 비롯한 북유럽과 프랑스의 명작들을 다량으로 소장하고 있다. 16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브뤼겔은 15세기 북유럽 특유의 사실주의와 고딕적 환상으로 당대를 매혹시킨 얀 반 에이크와 17세기 바로크의 화려한 조형 언어의 중심축인 루벤스의 맥을 이으며 플랑드르 회화의 황금기를 대표한다. 그는 요셉과 정혼자 마리아가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으로 호적 등록을 위해 조상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귀향한 장면(루카복음 2장)을 묘사한다. 브뤼겔 일가는 그가 남긴 45점의 작품을 다량으로 복제하는 방식으로 4대에 걸쳐 200년간 공방을 운영했는데, 이 작품의 복제품은 현재까지 13점 발견되었다. 관람객은 전통적 성서 주제를 빌려와 16세기 플랑드르 지역으로 완벽하게 재현한 북유럽의 베들레헴을 본다.
네덜란드 남부의 겨울 풍경으로 묘사된 그리스도 탄생 전날의 베들레헴 지방은 브뤼겔이 추구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종교가 조화롭게 결합되었다. 그는 성서 내러티브를 시골 농민의 일상 생활로 설정했으며, 성지와 성가족을 부각시키는 시각적 장치도 암시도 시도하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걸린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평선으로 향하는 해질녘에 도착한 마을은 인산인해로 붐빈다. 목수의 연장인 톱을 맨 요셉은 등을 돌려 호적등록을 위해 인구조사관에게 향하고, 긴 여정에 피곤한 마리아는 눈을 감고 나귀에 앉아 있다. 번잡하고 활기찬 마을 풍경의 전면에 위치한 두 인물의 크기와 색채는 주변과 구분되지 않는 보통의 존재로, 일상에 집중한 등장인물 모두는 이들에게 관심조차 없는 주연이자 조연이다. 이미 만원인 여인숙 표시의 화환이 걸린 건물 외벽에는 스페인 펠리페 2세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독수리 문장이 쌍으로 걸려 있다. 관람객은 만삭의 마리아 등 뒤로 탄생의 주무대가 될 허름한 마구간과 주변의 눈 덮인 화단에 십자가를 장식하는 인물을 발견한다.
브뤼겔은 수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움직임을 전체적으로 통일시켜 복잡한 화면을 일관성있게 아우르는 탁월하고 독보적인 구성 능력을 발휘한다. 풍경화의 장르에 일상 생활과 성서를 재구성해 풍요롭게 제시하는 다양한 시각 언어는 그의 자전적 예술적 고백록이다. 평화롭고 정겹기만 한 마을 풍경과 덮인 눈은 당대 무기력한 농민의 핍박받는 삶을 가리는 도구이자 장치이다. 지친 요셉이 향한 여인숙의 인구조사관은 네덜란드를 지배하는 스페인의 세금징수원으로 로마황제의 절대 권력을 비유한다. 과도한 세금정책으로 피폐해진 농민 생활에 지독한 한파로 해안에 빙산이 나타나는 천재지변의 자연재해까지 더해진다. 증폭된 종교적 갈등, 칼빈주의자들의 가톨릭 박해와 성상파괴(Beeldenstorm)와 대응하는 스페인 군대의 비가톨릭인을 향한 잔인한 탄압은 80년 전쟁이 발화되며 야만적 겨울을 맞는다. 브뤼겔은 멀리 공중에서 인간의 어리석은 탐욕과 부도덕한 모습의 부조리한 현실을 새의 눈으로(조감도 bird‘s-eye view)내려다 본다. 관람객의 관조적 응시는 잔혹한 당대를 조롱하고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담담한 이해와 연민의 시선이다.
브뤼겔은 인간의 본성과 일상사의 보편적 진리를 백과사전적 인물 묘사로 간결하게 비유해 신비로운 자연 속의 익명의 대서사시를 서술한다. 그는 생활 속의 종교, 스쳐 지나가는 역사적 맥락의 한 시점을 빌어 당대 현실과 농민의 암울한 미래를 고발한다. 브뤼겔은 혹독한 추위 속 허름한 마구간에서 그리스도가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육화되어 오시는 인류 구원의 신비를 전달하며 황폐한 동시대인들을 위로한다. 그는 그림을 통해 16세기의 목격자이자 농민들의 비참한 사회와 역사의 증인임을 예술가로서 충실히 이행하며 독보적인 회화 체계를 구축한다. 관람객은 그림에서 그리스도 시대나 16세기나 현재나 눈 앞의 현실에 집착하느라 지나치는 바로 옆의 위대한 역사적 의미와 사건도, 결국 일상의 일부임을 전달받는다.
브뤼겔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는 화려하지도 소란하지도 않은 고요한 정적 속에 머무른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익명으로 오신 주님처럼……

  • 이순희 아네스
  • 미술 평론가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르네상스 및 현대미술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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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entered: 12-17-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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