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향기

라우렌시오 신부이 "살며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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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처음 여러분들에게 “ 사랑합니다 ” 라 는 인사를 건넸을 때가 생생합니다. 어찌나 어색해 하고, 낯설어 하시는지... 그런데 요즘은 제게 먼저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시는 분들이 많아서, 오히려 제가 수줍어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낯설었던 인사도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것을 보니, 문득 하느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신 지도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제게 많은 감정들이 교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지내던 곳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부터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막연함까지…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면서도, 또 공항까지 배웅해 준 동기 신부님들과 작별의 포옹을 하면서도, 애써 담담한 척 했지만, 마음 한 켠에 있는 두려움과 막연함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들은 하늘에서 홀로 보냈던 14시간이라는 비행 시간 동안 더 커져만 갔습니다. 이러저러한 생각들로 마음이 분주해서인지, 평소에 걱정이 없기로 소문난 저도 비행기에서 1 시간도 채 잠들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막연한 두려움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현실이 되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 낯선 곳에서 수속 절차는 어떻게 밟는지, 또 짐은 어디에서 어떻게 찾는 것인지… 한국에서 서품을 받고, 가톨릭 사제 복장인 로만 칼라를 하고 있는 신부인 저는, 순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 와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세례자 요한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떠오른 것은 그동안 사제로 살아오면서 커지셔야 하는 분은 그분이신데, 정작 커지셔야 할 그분은 작아지고, 작아져야 할 저는 커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서 저를 이 낯선 곳으로 보내시면서, 제게 원하셨던 것은 다시 작아지는 것, 곧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가 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이 낯선 곳으로 보내시면서 제게 원하신 것은, 다시 작아지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가 되는 것

어느 신부님께서 신학교 4학년 때, ‘내가 평생 사제로 살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민으로 갈등과 고통 속에 있을 때, 신부님을 다시 일으켜 준 것은 바로 어머니의 뒷모습이었습니다. 매서운 바람이 불던 어느 새벽, 촛불 한 자루 밝히고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은 신부님 마음 깊은 곳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첫 부임지로 떠나던 날, 어머니께서는 선물이라며 아들 신부에게 작은 보따리 하나를 건네며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풀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신부님께서는 부임지로 떠나는 차 안에서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 보따리를 풀어보았습니다. 보따리 안에는 배냇저고리와 아주 어렸을 적 입었던 작은 옷들, 글을 배운 적 없는 늙으신 어머니가 꾹꾹 눌러 쓴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막내 신부님! 신부님은 원래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저 또한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혹시라도 미국 생활에 익숙해졌을 때, 또 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을 때, 제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이였던 순간을 잊어버리고, 그분은 작아지고, 제가 커질까봐 그렇습니다.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감사한 마음은 당연히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감사함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들 또한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제가 ‘작은 사람’이었음을 잊지 않게 도와주신 분들을 위해 묵주를 꺼내봅니다. 묵주기도 성월을 보내고 있는 지금, 그분은 작아지고 나는 커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커지고, 나는 작아질 수 있기를 어머니께 청해보는 것이 어떨런지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들도 원래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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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entered: 10-22-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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