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성인

모든교인의 마음에 사라지지지않는 금지탑을 남겨준 정하상 바오로 주보성인

성 정 바오로

우리 본당의 주보 성인 정 하상 바오로는 연경 삼천리 길을 9차례나 오가며 신부 영입을 위해 헌신하는 등 일생을 바쳐, 꺼져갈 듯 하던 한국 천주교회를 재건한 위대한 신앙 선조이다. 정 하상 바오로는, 1795년 지금의 경기도 양평 땅인 양근에서 정약종(아오스팅, 유소사 세실리아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약종은 남달리 굳은 신앙을 가진 분으로, 조선 천주교 최초의 전도회장이었고, 한글로 주교요지를 저술한 분이었다. 하상은 위로 형 철상, 아래로 누이 동생 정혜가 있었다. 아버지의 형제분들은 정약현, 정약전, 정약용으로, 당대 최고의 재사이자 학자들이었다.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 고향을 떠나 전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했지만 하상이 7살때인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 전 가족이 관헌에 체포되고, 아버지 약종과 형 철상은 참수되었다. 백부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숙부인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갔으며, 하상의 집 재산은 몰수되었다. 가장 혹독한 고난을 당한 하상의 가족은 비난과 냉대, 가난에 시달렸지만 세 가족의 신앙은 꺾일 줄 몰랐다.

신유박해로 조선 교회를 위해 최초로 파견됐던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교회 조직이 철저하게 파괴되자 하상은 신앙생활에 위협을 받고 있던 조선 교회를 위해 북경으로부터 성직자를 모셔오려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나섰다. 하상은 양반임에도 북경행 사신을 수행한 통역관의 하인을 자청하여 험한 삼천리길을 멀다않고 중국을 9차례나 왕복, 신부를 모셔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1816년에는 북경으로 가 피레스 주교를 만나고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하상은 그때 북경에서 영세와 견진을 받았다. 드디어 1833년에는 중국인 유 방제 신부를 모셔왔다.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한 조선 교회에 최최의 주교로 임명된 브루기에르 신부가 임지에 도착하기 전 병사하자, 하상은 1836년 프랑스의 모방신부를 맞아들였다. 유방제 신부가 되돌아간 뒤를 이어 1837년에는 샤스탕 신부와 앵메르 주교를 맞아들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3명의 성직자를 모시게 되었다. 이는 오로지 20년에 걸친 하상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성직자가 들어왔다 해도 그들의 활동은 비밀레에 행해져야 했고,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조선 신자 간부들이 일일이 협조를 해야만했다. 하상이 누구보다도 바쁘게 움직여야 했음은 물론이다. 정 하상은 단순히 성직자를 모셔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심, 덕행, 강직한 성격, 명석한 두뇌로, 어디서나 교인들의 인도자가 되었고, 한국 교회의 모든 일을 앞장서 이끌어 나갔다. 그는 또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김대건, 최양업등 세명의 젊은이들을 외국으로 보내는데도 온 힘을 기울였다.

한편 앵베르 주교는 조선 안에서 빠른 시일안에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1838년 정 하상과 함께, 조선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의 아들 이신규등 4명의 학생들을 뽑아 신학 교육을 시작했다. 당시 44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독신으로 있었던 정하상은 감사와 희망으로 전력을 다해 공부에 전념했다. 교육은 충청도 배론에 있는 옹기 굽는 가마 안에서 비밀리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1839년, 3대 박해의 하나인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오가작통법 등으로 전국의 천주교회를 탄압한 이 박해로 정하상 일행은 관헌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또한 그의 누님과 어머니도 함께 체포되었다.

그를 문초한 관헌들은 정하상에게 서양인 신부들의 행방을 댈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하상은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여러차례의 고문에도 결코 그들의 행방을 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당하게 천주교의 교리를 설파했다.

정하상은 관헌들에게 “…다른 나라에서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참된 가르침을 배척함은 옳은 일이 아니오. 천주교는 누구나 신봉하여야 하는 종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1839년 9월 22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돼 순교했다. 그의 나이 45세때였다.

그에 관한 기록은 ‘피가 땅에까지 흘러내렸으나, 하상의 신색은 태연 자약함을 잃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 유소사는 79세의 고령에 고문을 이기지 못해 그 해 11월 옥중에서 숨지고, 누이동생 정혜는 12월에 오빠가 참수당한 자리에서 역시 참수형으로 사라져갔다. 이로써 정하상 일가족 5명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전심 전력으로 조선 교회 재건을 위해, 그리고 성직자 영입을 위해 힘썼던 정 하상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호교론인 상재상서를 저술한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그가 체포된 다음날, 박해 주동자들에게 제시된 장문의 상재상서는 고전을 인용해 가며 때로는 근엄하게, 때로는 명쾌하게 교리를 해설, 천주교 박해가 부당하다는 점을 논증하고 있다. 상재상서는 고종 24년(1887) 홍콩에서 인쇄 간행돼 널리 중국 전도에 활용되었다니, 그 논문의 가치는 국내에서보다 오히려 외국에서 더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 되었다.

정식 종교적 지도자인 성직자도 없었던 조선교회는 부단한 박해를 받으며 고난의 삶을 산 정하상이라는 일개 평신도의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노력과 분투로써, 그 명맥이 유지됐을 뿐 아니라 기적적인 발전을 보였던 것이다. 천주교 성 정 바오로 성당은 불굴의 순교열로 한국 가톨릭 교회, 모든 교인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은 금자탑을 남겨준 정 하상 바오로를 주보 성인으로 모신 것을 영광으로 여길뿐 아니라, 그같은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